노벨상 수상의 자격

노벨상 시즌이 끝났습니다. 올해는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의 학자가 받은 상이 없어서인지 다행스럽게도 다소 조용히 넘어갔습니다. 매년 가을이 되면 돌아오는 우리 나라의 노벨상 앓이는 축구 시즌이 되면 돌아오는 “우리 나라 축구 이대로 좋은가”와 함께 모든 언론이 주기적으로 치르는 홍역 앓이 인것 같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여러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낸 학자에게 부여되는 노벨상은 전세계의 수 많은 상들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누가 노벨상을 받는가는 매년 범지구적인 초미의 관심사 입니다.

2015년도 노벨상 수상식. 최근 3년간 일본이 연속으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바람에 더 시끄러웠었습니다.

현대 과학에서는 어떤 위대한 업적이 특정 개인 한 명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과학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노벨상이 처음 시작되었던 180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단 한 명 천재의 혁신적인 생각만으로도 노벨상을 받을만한 업적이 달성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만 현대 과학은 거대한 자본, 국가 수준의 지원, 천재적인 능력과 노력을 지닌 과학자 집단, 다른 과학자들과의 협력 및 공동 연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운이 없이는 위대한 성과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늦깎이 독학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해 박사학위 논문으로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은 과학계의 지존, 반 데어 발스 (van der Waals, source:wikipedia)

노벨 위원회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있는지, 최초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서 명시된 “이전 해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1인”과는 달리 최대 3명까지 공동 수상 하는 방식으로 변경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과학에서 특정 과학적 성과를 단 3명의 업적으로 정의 내리고 상을 주기에는 큰 무리가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2017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중력파 논문의 저자 목록입니다. 일반적으로 과학 논문은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가장 큰 기여를 한 저자가 제 1저자로서 맨 처음에 이름이 나오고 연구를 총괄하는 사람이 교신 저자로서 맨 마지막에 이름이 나옵니다만, 이 중력파 논문의 경우 저자가 전세계 80여개 기관의 수백명에 이르다 보니 논문의 마지막에 별도의 섹션을 마련하여 저자 이름을 나열하였습니다. 논문 서두에 나오는 저자 이름에는 알파벳 순서 상 처음으로 나오는 한 명의 이름만 적어 놓았습니다. (Dr. Abbott은 조상님께 감사해야 할 듯)

내 이름이 어딘가에 들어가 있어도 놀랍지 않을 정도…

이렇게 한 연구에 수 많은 사람이 기여 하였을 때에 노벨상은 누구에게 수여가 되는 것일까요? 연구에 가장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낸 사람에게 수여될까요 아니면 연구 총괄 지휘자에게 수여될까요. 특히 이렇게 저자가 많은 경우는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요. 다행히도 이번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3명은 이러한 논란이 없는것 같습니다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노벨상 수상의 자격”이라 이름 붙인 이 글에서는 국내의 수 많은 노벨상 관련한 기사들과 같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가를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수 많은 공로자들 중에서 노벨상이 수여되는 사람은 어떻게 결정되는가에 대한 한 사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노벨 위원회의 공식 입장은 아닙니다.)

Walter Gilbert

월터 길버트 (source : Lindau Nobel laureate meeting)

월터 길버트는 1932년 미국 태생의 과학자입니다. 보스턴 출신인 길버트는 집에서 가까운 하버드 대학으로 진학하여 화학과 물리학으로 학부와 석사를 마친 후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를 받습니다. 1956년 모교인 하버드로 돌아와 조교수 생활(24세에 하버드 대학 조교수)을 시작한 길버트는 아내의 소개를 통해 DNA 이중 나선 구조로 유명한 제임스 왓슨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이는 화학과 물리학의 백그라운드를 가진 그가 생물학에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됩니다.

1970년 중반 길버트는 당시 전세계 생물학자들의 초유의 관심사였던 유전자 분석법, 즉 시퀀싱을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미 영국에서는 인슐린 단백질의 시퀀싱을 마쳐서 노벨상을 받은 프레데릭 생어(Frederick Sanger)가 DNA 시퀀싱으로 뛰어 들은 상태였기 때문에 누가 더 먼저 DNA 시퀀싱 방법을 개발하는지에 대한 매우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몇몇 유전자에 대해서 시퀀싱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1970년대 초에 몇몇 그룹에서 나오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모든 종류의 유전자에 쉽게 재현 가능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갈 길이 먼 상태였습니다.

이 시기 길버트의 실험실에는 한 박사 과정 학생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의 이름은 앨런 맥삼(Allan Maxam)입니다. 이 똘똘한 대학원생의 아이디어에 힘입어 맥삼과 길버트는 1977년 화학적 방법(chemical cleavage)을 이용하여 시퀀싱 방법을 발표합니다.

맥삼과 길버트가 발표한 시퀀싱 방법에 관한 논문. 맥삼이 제 1저자, 길버트가 제 2저자이자 연구 책임자임을 볼 수 있습니다. (Contributed by Walter Gilbert)

몇 개월 늦기는 하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경쟁 그룹의 리더인 생어 또한 다이디옥시 방법 (dideoxy method)라 불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시퀀싱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발표합니다.

생어가 발표한 논문. 생어 본인이 1제 저자이자 교신 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Contributed by F. Sanger)

원리는 다르지만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같은 이 두가지 염기 서열 분석 방법은 전세계 생물학계에 큰 파장을 가지고 왔고, 결국 1980년도 노벨 화학상은 Paul Berg (최초로 재조합 DNA를 제작. GMO의 아버지?)와 함께 이 두 그룹에 수여가 됩니다. 생어 그룹은 프레데릭 생어의 기여가 컸다는 점에 대해 큰 이견이 없었기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 선정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생어는 이미 노벨상을 한번 수상한 경력이 있고, 생물학계에 영향력이 큰 잘나가던 과학자였기 때문에 더더욱…)

하지만 길버트 그룹의 경우 약간의 이견이 있었습니다. 그들 논문의 핵심 개념인 화학적 절단 (chemical cleavage)의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은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맥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그가 제 1저자였지만 연구 책임자는 길버트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노벨상은 지도 교수인 길버트에게만 수여됩니다. 해당 연구의 제 1 저자이자 가장 중요한 개념을 발명해 낸 맥삼이었지만 노벨상 수상 관련하여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개발한 시퀀싱 방법의 명칭에 본인의 이름을 반드시 넣는 것으로 합의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어가 개발한 방법은 Sanger method, 맥삼이 개발한 방법은 Maxam-Gilbert method라고 현재까지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전세계의 과학자들에게 삽시간에 퍼져 나갔으며, 지금 방식으로 비유하자면 안드로이드 vs iOS와 비슷한 경쟁의 양상을 띄게 됩니다. 처음 주도권을 잡은 것은 Maxam-Gilbert 방식이었습니다. 더 적은 양의 DNA를 필요로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방식 자체가 일부 과학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Sanger 방식에 비하여 좀 더 우아한 (elegant) 방법이라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polymerase를 사용하는 Sanger의 방법은 1980년대에 이르러 생물학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든 한 방법과 만나게 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그 결과 1세대 시퀀싱 기술을 대표하는 방법으로 자리잡게 되고 Maxam-Gilbert 방식은 교과서의 한쪽 구석에 원리만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남게 됩니다.

노벨상 수상 이후 Gilbert는 승승장구하여 과학 뿐만 아니라 유전학을 이용한 여러 사업에도 뛰어들게 됩니다. 그의 제자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얼마 전 저희가 인터뷰 기사를 실었던 George Church 가 있는데, 아마도 그의 사업가 기질은 스승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길버트는 인트론과 엑손의 개념을 최초로 제안하는 등의 업적도 쌓았습니다만, PCR의 발명으로 노벨상을 받은 Kary Mullis와 함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의 원인이 HIV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등의 개인적인 흑역사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2001년도에 하버드 대학 교수직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예술 사진가로서의 경력을 쌓아 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다양한 경력을 한 줄로 표현한 한 인터뷰 자막.

이에 반해 맥삼은 생물학계를 뒤흔든 연구 결과의 제 1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길버트에 비하면 다소 부족한 삶을 살게 됩니다. 공식적인 문헌상으로 그와 길버트와의 관계를 직접 확인하는 것은 다소 어렵습니다만, 길버트를 개인적으로 아는 한 지인에 따르면 노벨상 사건 이후로 매우 낙심하였다고 하며 (저라도 그렇겠습니다.)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마무리 한 후 호주의 Dana Farber Cancer Institute에서 조교수를 시작합니다. 1990년 초에는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와 Biolinguistics institute에서 일하고 결국 은퇴합니다. 1980년대 이후에는 그리 눈에 띌만한 연구 실적이나 논문이 발표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습니다만, 그때 만약 노벨상이 길버트가 아닌 맥삼에게, 혹은 맥삼과 길버트 모두에게 수여 되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맥삼이 이후에 과학자로서 큰 성공을 거둘지 여부는 전적으로 그의 능력과 열정에 달려 있었겠습니다만, 만약 그때 그에게도 노벨상이 주어졌다면 이후 그의 과학자로서의 삶은 훨씬 더 쉬웠을 것이고 우리는 그의 또 다른 위대한 발견을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노벨상이 위대한 발견을 한 과학자에게 주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만, 위대한 발견을 했다고 해서 모두 노벨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벨상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매우 의미 없는 일이죠. 그저 즐겁게 연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옆에 와 있을 수도 있는게 노벨상인 것 같습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내가 위대한 발견을 했을때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자격에 조금 더 가까워 지려면 아무래도 교신 저자 정도는 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야 할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인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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