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알코올)의 섭취는 뇌의 능력을 저하 시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술을 마셨을 때 말이 꼬이기 시작하고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흔히 “필름이 끊긴다”라고 하는 일시적인 단기 기억 상실증까지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 모든 현상들은 술을 마신 “이후“에 발생하는 것들로서, 뇌신경학적 용어로는 선행성 기억 손상 (anterograde memory impairment)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음주는 음주하기 “이전“의 기억을 강화시켜 준다고 합니다. 일단 알코올이 들어가면 그때부터 일어나는 일들은 선행성 기억 손상에 의해 잘 기억이 나지 않게 되지만, 그 이전의 일들은 오히려 더 뚜렷하게 기억하게 된다는 뜻 입니다. 이 사실이 처음 보고 된 것은 놀랍게도 지금으로부터 무려 33년 전인 1984년에 발표된 한 논문입니다. 이 연구자들은 제한된 실험실 조건 내에서 실제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한 뒤 이러한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역행성 기억 증강 (retrograde enhancement of memory) 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 현상의 이유에 대한 가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널리 받아 들여지고 있는 것은 기억 생성의 중추인 해마 (hippocampus)를 알코올이 잠시 멈추게, 혹은 쉬게 함으로서 그 이전에 이미 뇌에 들어온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여력이 많아지기 때문이라는 설명 입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번 주 Nature Scientific Report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는 기존 실험에 비해 좀 더 일상 생활에 가까운 환경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술 마시기 전과 후의 기억력 측정을 진행하였습니다. 연구자들은 총 88명의 지원자를 모집하였고 이들을 대상으로 기억력을 테스트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예를 들면 기존 영어 어휘에는 없는 전혀 새로운 단어의 소리를 헤드폰을 통해 반복적으로 들려주고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이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등의 방식입니다.
일단 전체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술을 마시기 전에 1차적인 테스트를 진행하였습니다. 이후 그리고 지원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게만 술을 마시도록 한 뒤 (다른 그룹은 비알코올 음료만 섭취), 다음날 아침 2차 테스트를 진행하였습니다. 이 모든 실험은 실험실이 아닌 지원자 각자의 집에서 진행하도록 했고 술의 양은 본인이 원하는 만큼 마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참가자들이 알코올을 평균 약 83g 정도 마셨다고 하니 맥주로 치면 대략 1,500cc 정도 마신 양입니다.
그 결과, 술을 마시기 전에 진행한 1차 테스트의 결과는 두 그룹이 커다란 차이가 없었습니다만, 술을 마신 다음날 아침 진행 한 2차 테스트에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의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술을 마신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하여 훨씬 더 많은 정답을 맞춘 것입니다. 게다가 알콜 섭취량과 정답을 맞춘 확률은 양의 상관관계를 보였습니다. 즉, 술을 더 많이 마실 수록 더 많은 정답을 맞춘 것입니다.
연구진은 그 원인이 기존에 알려진 해마의 휴식에 의한 효과 외에도, 술 마신 이후 수면을 취할때 자주 발생하는 느린 뇌파 수면 (SWS : slow wave sleep)에 의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느린 뇌파 수면은 이달 초 기초과학연구원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기억력 증진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발표된 바 있습니다. (IBS의 공식 보도 자료)
연구진은 이러한 술의 특성을 환상적이다 (fascinating effect)라고 논문에서 언급하였습니다. 시험 전 날 열심히 공부한 후 자기 전에 다음날 피곤하지 않을 만큼의 술을 마시고 잠드는 것도 좋은 성적을 거두는 한가지 방법 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술이란 것이 몸에 단순히 한가지 효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니 성급한 일반화는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참고로 연구진은 원래 좀 더 일상 생활에 가까운 환경을 위하여 펍이나 바에서 이 실험을 진행하고자 하였으나, 술집 주인들이 이 실험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합니다. (met heavy resistance from these businesses)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장소가 자원자들의 집이라고 합니다. (과학의 길이 이렇게 멀고도 험합니다.) 연구 결과를 미리 알았더라면 펍 주인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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