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존 스노우 역의 Kit Harrington과 이그리트 역의 Rose Leslie, 링크)
빨간 머리는 서양에서도 그리 흔한 머리 색은 아닙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전세계 인구 중 약 1-2%만이 빨간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서양인만을 대상으로 할 경우 약 2-6% 까지 높아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수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은 빨간색의 머리가 인간이 가진 형질 치고는 참 눈에 쉽게 발견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남과의 다름이 차별로 이어지던 중세의 흑역사에서는 빨간 머리를 한 사람들이 이 눈에 띄는 형질 때문에 많은 박해를 당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빨간 머리는 일반적으로 유럽에서도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그리고 북유럽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머리 색깔이며, 이 사실을 반영한 듯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는 북쪽의 방벽 너머에 사는 사람들인 야인들 (Wildling)중 대표적인 두 캐릭터인 토르문드와 이그리트, 그리고 붉은 마녀 (멜리산드레)가 빨간 머리를 한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주인공인 존 스노우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든 이그리트의 역은 스코틀랜드 출신 배우인 로즈 레슬리(Rose Leslie)가 맡았습니다. 그는 약간의 붉은기가 도는 갈색 머리입니다.
붉은 마녀 멜리산드레 역을 맡은 네덜란드 출신 캐리스 반 하우텐(Carice van Houten)은 원래 갈색 머리이지만 이 역할을 위하여 붉은색으로 염색 하였으며, 토르문드의 역할을 맡은 크리스토퍼 히뷰(Kristofer Hivju)는 노르웨이 출신으로서 본인의 본래 머리 색으로 연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편집장은 왕좌의 게임 매니아입니다.)
유럽에서도 그리 흔한 색깔은 아니다보니 매년 9월 첫째주가 되면 전세계의 빨간 머리들이 모이는 축제가 네덜란드의 브레다에서 열립니다.
한국인 중에서 빨간 머리를 찾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빨강 머리 앤”과 “강백호”가 아니었으면 빨간 머리라는 어휘 마저도 낯설었을지도 모릅니다.
“빨강 머리 앤”의 원작 소설의 제목은 Anne of green gables, 굳이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초록색 옥탑방 사는 앤” 정도가 되겠습니다. 아마도 만화화 하는 과정에서 일본 작가가 좀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제목으로 번역한 것이 우리 나라에 그대로 도입되었기 때문에 국내에는 빨강 머리 앤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것 같습니다.
빨간 머리의 유전학
빨간 머리는 열성 형질(“우성/열성” 용어에 관해서는 일단 현재의 기준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입니다. 따라서 부모 모두가 빨간 머리의 보인자 (carrier, 이 용어도 우성 열성 만큼이나 바꿔야 할 대상 1위라고 생각합니다.)이거나 둘 중 한명이 빨간 머리이고 다른 한명이 보인자일 경우에 자녀에게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아래의 단란한 가족 사진에서 아빠는 보인자로 추정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확률적으로는 네 명의 딸들 모두가 빨간 머리로 태어나기란 쉽지 않을텐데, 희귀한 우연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재미있는 가족 사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빨간 머리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은 Melanocortin 1 receptor (줄여서 MC1R) 입니다. MC1R은 멜라닌 색소를 생성하는 세포에 주로 존재하는데, 뇌하수체에서 만들어내는 멜라닌 생성 관련 호르몬의 시그날을 받아 멜라닌 색소를 형성합니다. 멜라닌 색소는 일반적으로 phaeomelanine과 eumelanine의 두가지 종류가 존재하는데, 전자는 노란색이라 붉은 색을 띄고 있고 후자는 갈색이나 검은색을 띠고 있습니다. MC1R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일부 단백질이 바뀔 경우 phaelmelanine의 생성이 더 많아져 머리 색깔이 빨갛게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전자에 관한 많은 사람들의 오해 중 하나는 한가지 형질이 한가지 유전자로부터 나온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특정 형질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수십개 혹은 수 백개의 유전자가 서로 얽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 특정 돌연변이가 있다고 해서 그 형질이 반드시 발현되는 것도 아닙니다 (penetrance라고 합니다.) 따라서 특정 유전자와 형질이 1:1로 연결이 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멘델이 콩을 이용해서 유전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본인의 철저한 노력과 과학적 관찰 뿐만 아니라, 그가 찾은 표현형, 즉, 껍질의 쭈글쭈글함과 매끈함이 운 좋게도 단일 유전자 (혹은 같이 이동하는 유전자 세트)였음도 큰 기여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형질을 선택하여 연구를 시작한 멘델의 안목도 중요했겠죠.)
반대로 하나의 유전자가 여러가지 형질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많은데, 빨간 머리를 만들어 내는 MC1R은 이러한 유전자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또 다른 형질들을 한번 알아봅시다.
– 주근깨
주근깨는 멜라닌의 과발현으로 인한 색소 침착이라고 정의됩니다. 주로 자외선에 의해 발생합니다만 빨간 머리 유전자인 MC1R에 생긴 돌연변이는 주근깨 생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빨간 머리를 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얼굴에 주근깨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이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가사가 아닌겁니다.
– 통증에 민감
MC1R에 발생한 돌연변이는 피부를 통해서 느끼는 자극에 좀 더 남다른 반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열 감각 (차가운 감각과 뜨거운 감각 모두)에 훨씬 민감합니다. 빨간 머리들이 추위를 많이 타는 것은 엄살이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이에 관하여 전세계 빨간 머리들의 대표 웹사이트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Red and Proud의 대표 Simon Cheetam은 논평을 통해 이 연구를 환영하면서도, 건장하고 추위에 아랑곳 하지 않는 스코틀랜드 전사의 신화가 깨진 것은 아쉽다라고 하였습니다.
– 더 많은 마취제가 필요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들은 마취에 더 둔감합니다. 수면 마취의 경우 약 20% 가량의 더 많은 마취제가 필요하며, 치과 치료에 많이 사용되는 리도카인의 경우 잘 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 피부암 발생 가능성의 증가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피부암 발병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이미 통계적 수치상으로 잘 알려져 있던 사실입니다. 앞서 이야기 한 대로 전세계 인구 중 빨간 머리의 비율은 약 2% 정도이지만, 전체 피부암 환자들 중 빨간 머리의 비율은 약 16%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기에는 검은색 멜라닌 색소를 합성하지 못함에 따라 자외선으로부터의 완벽한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2016년도 영국 Sanger Institute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피부암 발생 가능성은 빨간 머리를 가지지 않은 MC1R 변이의 보인자의 경우에도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평균적으로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이 피부암 발생 가능성은 빨간 머리가 아니면서 21세가 더 많은 사람과 비슷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MC1R이 DNA repair에 관여하기 때문인 것으로 연구진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파킨슨 병 발병률의 증가등이 보고된 바 있습니다.
결론
일반적으로 생명체의 진화는 생존에 불리하지 않는 한 가장 많은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진화의 과정에는 어떤 유전자가 좋다 나쁘다와 같은 가치 판단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여태까지 밝혀진 내용만으로 MC1R 유전자의 변이는 여러가지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하여 불리한 표현형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저 변이가 이토록 오래 살아 남은 데에는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인류의 유전체학은 이제 걸음마 수준이고 유전자의 세계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워낙 많이 있는 만큼 앞으로도 더 많은 연구가 진행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학이 없이 종교가 지배하던 시절 빨간 머리는 불길함의 징조로 여겨져 수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당했고 많은 여성들이 마녀 사냥으로 죽은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과학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이해를 도움으로서 불합리하고 원시적인 미신을 타파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모두가 공존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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