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mann/Corbis
‘미치광이 과학자(mad scientist)’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슈퍼맨>에 등장하는 악당 렉스 루터 박사처럼 세계를 정복하려는 과학자가 대표적이죠. 아니면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을 만들어내는 프랑켄슈타인 박사도 유명합니다. 아마도 완전히 광인이라면 과학자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을 테니, ‘미치광이’라는 표현은 그의 지적 능력이 아니라 그가 지닌 목적이나 도덕관 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사실, 외연을 아주 넓게 잡으면 실험에 몰두하던 중 달걀 대신 시계를 삶았다는 일화를 남긴 아이작 뉴턴까지 포함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죠. 그래서인지 일본의 정신의학자 나카이 히사오와 이다 신은 『천재의 정신병리』라는 책에서 뉴턴을 분열증적 정신 세계를 보인 대표적 과학자로 꼽기도 합니다.
이 분류에 포함될 과학자가 여럿 있겠지만, 그중 대표는 미국의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일 겁니다. 그는 동시대에 활약한 대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과 전기 공급 방법을 놓고 직류 대 교류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에디슨이 직류 전송을 주장하며 여러 기간망을 선점했지만, 결국 지금 우리는 테슬라가 주창한 교류 전송을 사용하고 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죠. 그는 당시 시각으로 보기에 괴상한 발명품을 여럿 내놓았고, 그 덕에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라디오 발전에 큰 영향을 준 테슬라 코일(Tesla Coil)이 대표적인 작품입니다.[1] 전자현미경, 수력발전소, 형광등, 라디오, 무선 조종 보트, 자동차 속도계, 최초의 X선 사진, 레이더 등을 발명했거나 직전 단계 기술을 내놓아 개발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테슬라는 괴팍한 성정과 기행으로도 유명했다고 해요. 잘생긴 외모에 언변은 뛰어났지만, 타협을 모르는 성격에 주변 사람들, 심지어 투자자들과도 언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대형 무선통신 센터를 건설하려다 투자를 받지 못하자 그는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외로이 사망했다는군요.[2]
테슬라가 보여준 두 가지 모습, 즉 당대를 뛰어넘는 과학적 업적과 타협하지 않고 주변 모두와 불화하는 성격이 미치광이 과학자를 정의하는 두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리학자였던 테슬라와 달리 미치광이 과학자를 정형화한 작품들, 그러니까 앞서 언급한 『프랑켄슈타인』이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 허버트 조지 웰스의 『모로 박사의 섬』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생물학자였죠.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시체를 조립해 생명을 불어 넣었고, 지킬 박사는 화학 약물을 통해 인격을 분리했으며, 모로 박사는 동물을 인간으로 변이시켰습니다. 이들이 한 작업은 의학과 생물학 그 중간 어디에 걸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 모두에 들어맞는 인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테슬라의 성격과 성취를 모두 갖고 있으면서 의사이자 생물학자였던 사람 말입니다. 오늘은 그 사연을 소개해볼까 해요. 그 이름은 이그나츠 제멜바이스(Ignac Semmelweis, 1818~1865)입니다.
“산욕열은 의사 때문에 걸리는 병입니다!”
이미 여러 책에서 소개된 인물이지만 그 생애를 먼저 더듬어볼까 합니다. 제멜바이스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약한 산과 의사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산부인과라고 부르는 분야는 산과(obestetrics)와 부인과(gynaecology)라는 세부 분야가 합쳐진 것이다. 산과는 출산 과정을, 부인과는 여성 생식 기관에 발생하는 질병 등을 돌보는 분야다.)
당시 빈 의과대학은 앞서 나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어요.[3] 당시 대 제국이었던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중심지였다는 물적 조건에 더해, 훌륭한 세 사람이 모여 있었거든요. 병리 해부학 교수 카를 폰 로키탄스키(Carl von Rokitansky, 1804~1878)는 임상적 증상이란 기관과 조직에 생긴 병리학적 변화가 바깥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이론은 병리 해부학이라는 분야를 탄생시킨 조반니 모르가니(Giovanni Morgagni, 1682~1771)가 이미 주장하였으며 지금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당시엔 아직 생소한 이론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체액 불균형이 질병을 초래하며 기관에 나타난 것은 그 증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환자 침상 앞에서 해부학적으로 생각하라고 하며, 부검실에서는 병이 진행하는 개별적인 양상을 살펴 임상에서 나타나는 패턴으로 정립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뛰어난 임상가 요제프 슈코다(Joseph Škoda, 1805~1881)입니다. 청진법과 청진기를 개발한 르네 라에네크(René-Théophile-Hyacinethe Laennec, 1781~1826)처럼그는 타진과 청진에 집중하면서 이 발견을 원인이 된 병리학적 변화와 정확히 연결지었습니다. 프랑스 의사들보다 조직이 지닌 물리적 특성에 더 주의를 기울인 그의 방법은 배우기가 더 쉬웠습니다. 차갑고 엄격했던 그는 치료보다 진단에 큰 관심을 지닌 한편, 예방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염병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지요. 마지막으로 페르디난트 폰 헤브라(Ferdinand Ritter von Hebra, 1816~1880)는 위 두 사람에게 배운 방법을 토대로 현대 피부과학을 정립한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이들이 선도한 빈 의과대학은 세기말까지 유럽 의학을 이끄는 중심지 중 하나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 제멜바이스는 이들에게 배우고 또 함께 공부한 사이였습니다. 1837년 빈 대학에 입학한 그는 1844년 산과를 선택하면서 로키탄스키로부터 여자 시신을 해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죠. 1847년까지 산과학 교수 요한 클라인(Johann Klein, 1788~1856)의 조수로 일하던 그는 로키탄스키와 슈코다에게 받은 영향을 토대로 해부학과 임상 증상을 연결 짓기 시작합니다.
당시 산모는 산욕열(puerperal fever)이라는 병으로 사망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출산 과정에서 여성은 흔히 생식 기관에 큰 상처를 입게 되는데, 이 부분이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지금은 이 질병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없지만, 당시만 해도 많은 산모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전통에 따라 생각하던 사람들은 이 병이 아이를 낳는 방에 스며든 나쁜 공기(miasma)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제멜바이스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직 세균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 전염병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도입되던 개념으로, 썩어가는 시체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빈 종합병원에는 산과가 두 개 있었습니다. 제1산과는 산과의와 학생들이 출산 과정을 담당했고 제2산과는 조산사(midwife)가 맡았습니다.
(조산사 : 조산 과정을 보조하고 임산부, 신생아 보건지도를 담당하는 직종으로 의료법에 규정된 의료인이다. 간호사 면허를 취득 후 조산의 수습 과정을 거쳐 면허를 취득한다.)
숫자가 정확하게 집계된 것은 아니었지만 제1산과에서 산욕열이 많이 발생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아예 제1산과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산모도 있었다고 합니다. 산욕열은 병원에서는 무서운 병으로 맹위를 떨쳤지만, 집에서 출산하는 경우 산욕열은 흔한 병이 아니었습니다. 산욕열에 걸려 사망한 산모들은 흔히 자궁경부와 자궁에 큰 상처를 입고 있었어요. 나쁜 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의사들은 기후 조건에 따라 공기가 이동하는 양상이 다를 테니 계절에 따라 사망자 수가 차이 날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았죠. 병실을 청소한 다음에는 한동안 산욕열이 나타나지 않기도 했습니다.
제멜바이스는 이 문제에 집중했고, 산욕열로 사망한 환자의 숫자를 세기 시작합니다. 1861년 제멜바이스가 출판한 책 『산욕열의 원인, 개념, 예방(Die Ätiologie, der Begriff und die Prophylaxe des Kindbettfiebers)』에는 1841년부터 1846년까지 제1산과와 제2산과에서 출산한 산모 수와 사망한 산모 수가 실려 있습니다. 6년 동안 제1산과에서 10%에 가까운 산모가 사망할 동안 제2산과에서는 3.4% 만이 사망했지요. 어떤 요소인가가 제1 산과의 사망률을 높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멜바이스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죠.
이때 병원에서 존경받던 법의병리학 교수 야콥 콜레츠카(Jakob Kolletschka, 1803~1847)가 부검 과정에서 상처를 입은 후에 사망합니다.
(법의병리학 : 지금은 법의학(forensic medicine)으로 불리는 분야로, 부검을 통해 사망 원인을 밝히거나 시신 신원을 밝히는 등의 역할을 맡는다.)
제멜바이스는 콜레츠카 교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과 산욕열이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의심합니다. 제멜바이스가 자신의 책에 기록한 내용을 살펴볼까요.
“그(콜레츠카 교수)는 양측성 흉막염, 심막염, 복막염, 수막염으로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기 며칠 전, 한쪽 눈에 전이 조직이 형성되었다. 베네치아에서 온 예술품도 흥미로웠지만, 콜레츠카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나를 뒤흔들었다. 흥분한 상태에서 나는 콜레츠카를 죽음으로 몰고 간 병이 산모 수백 명을 죽게 만든 것과 같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산모들에서 임파선염, 복막염, 심막염, 흉막염, 수막염이 나타났으며 다수에서 전이가 나타났다.”
(전이 조직 : 현재는 전이(轉移, metastasis)라는 표현을 암세포를 대상으로 사용하며, 암세포가 원래 발생한 조직이 아닌 다른 조직에서 관찰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러나 세균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당시에는 염증 조직 또한 전이한다고 생각했다. 제멜바이스가 말하는 전이는 사실 세균 감염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상이다.)
제멜바이스는 콜레츠카 교수와 산욕열로 사망한 산모가 같은 증상을 보였다는 것, 콜레츠카 교수가 부검 과정에서 상처를 입었고 그것이 사망으로 이어졌다는 데에 착안합니다. 그는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시체 물질”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이 물질이 도구(콜레츠카 교수의 경우)나 의사 혹은 학생의 손(산모의 경우)을 통해 환자 상처로 옮겨져 병이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의사와 학생들이 소독약으로 손만 씻으면 산욕열을 예방할 수 있다고 본거죠.
아직 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와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 1843~1910)가 세균이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며, 그 지식을 토대로 치료약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기 전이었기에, 제멜바이스가 내놓은 주장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혼자서만 도달했던 결론은 아니에요. 미국의 저명한 의사이자 시인인 올리버 웬델 홈스(Oliver Wendell Holmes, 1809~1894)가 1843년에 이미 논문 「산욕열의 전염성(The Contagiousness of puerperal fever)」에서 의사를 통해 환자에서 환자로 산욕열이 옮겨진다고 주장했어요.[5] 홈스는 산욕열을 옮길 수 있으므로 출산을 도울 예정인 의사는 산욕열에 걸려 사망한 시신을 부검하면 안 되고, 만약 부검했다면 전신을 씻고 옷을 전부 갈아입은 다음 24시간이 지난 후에 출산 과정에 입회하라고 조언했지요. 진료실에서 산욕열이 한 건이라도 발생하면 의사는 몇 주 동안 산과를 쉬어야 하며 질병 발생 위험을 줄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멜바이스는 홈스가 저술한 논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 요인, 즉 “시체 물질”, 전달 매체(손), 신체에 발생한 상처가 있어야 병이 발생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 것은 제멜바이스가 처음이었습니다.[3]
1848년 제1산과의 사망률은 1.2%로 내려가, 1.3%의 사망률을 보인 제2산과와 비슷했습니다. 분명한 이론과 결과가 있었기에 병원에서도 제멜바이스가 요구한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산욕열이 바로 산과 의사 자신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했지요. 자신이 결국 산모 수백 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으니까요. 산과를 이끌던 클라인 교수의 저항이 제일 컸던 모양입니다. 그는 1849년에 조교 임기가 끝나자 제멜바이스를 다시 고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로부터, 그리고 당시 제멜바이스의 학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학계로부터, 또한 정신질환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게된 그를 보고, 사람들은 제멜바이스에게 부당한 압력으로 희생당한 의사라는 이미지를 덧붙입니다. 과거 의학적 권위와 맞서 싸운 투사 중 한 사람으로 그린 책도 있지요.[6] 인정받지 못한 천재가 주변의 시샘과 질투, 압력으로 뜻을 펴지 못하고 결국 외로이 죽지만, 후대에 재발견돼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는, 서사시 주인공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사실은 조금 다릅니다. 그를 무너뜨린 것은 주변의 압력이 아니라 제멜바이스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남다른 용맹으로 트로이를 함락시킨 뒤 위풍당당하게 귀환하지만 자신의 오만함으로 결국 살해당하고마는 아가멤논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여된 비참한 운명을 깨닫고 스스로 자기 눈을 뽑아버린 오이디푸스였던 것입니다.
제멜바이스의 자멸과 의사-과학자의 한계
서두에 언급한 세 사람, 로키탄스키, 슈코다, 헤브라는 제멜바이스를 지원하고 후원했습니다.[3] 빈 의과대학의 다른 여러 교수들도 제멜바이스가 내놓은 학설을 지지했고요. 헤브라와 로키탄스키가 먼저 제멜바이스의 주장을 글로 적어 소개했습니다. 슈코다는 연설에서 제멜바이스와 그의 주장에 관해 언급하고요. 결국 세 사람의 열정적인 도움으로 제멜바이스는 당시 과학적 논의를 이끌던 빈 의학회에서 강연할 수 있었고, 강연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제멜바이스는 자신의 주장을 보편적인 이론으로 만들기 위해 일보만 더 내디디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제멜바이스는 자기 주장을 책이나 논문 형태로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사람들 다수가 그를 편들었는데도 말입니다.
이 글을 쓰며 주로 참고하고 있는 책 『닥터스』를 쓴 전 예일대 의대 교수 셔윈 눌랜드는 제멜바이스가 이방인인데다 산과의사로서의 자부심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는 견해를 제시합니다. 서툰 독일어를 구사하는 헝가리인, 아직 선택 과목이던 산과의 위치가 스스로를 “잘못된 환경, 잘못된 사회 계급 출신에, 잘못된 사투리로 말하고, 제대로 된 대학 일자리에서 거절당한 서투르고 품위 없는 이방인”으로 여기게 했다는 겁니다.[3] 결국 열등감 가득한 한 인물이 자신에게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차버린 셈이라는 거죠.
하지만 그의 태도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는 주변 산과 의사가 손을 씻지 않으면 상대방을 가차 없이 살인자로 몰아가며 공격했습니다. 다른 과에서 그의 학설만 들은 동료들은 지지를 보냈겠지만, 아무리 그가 옳다 해도 같은 산과의사라면 그의 태도를 받아들이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나중에 그가 산과 교수들에게 보낸 서신은 살인자라며 공격하는 욕설로 가득해요. 예컨대 그가 1861년에 보낸 공개 서한을 봅시다. “교수님은 이 대학살에서 조력자였습니다. 이 살인을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살인을 멈추기 위해 저는 계속 지켜볼 것입니다.”[3]
게다가, 그가 자료를 서면으로 발표하지 않았기에 제멜바이스의 강연은 개요만 전달되었고, 구체적인 내용 없는 과격한 주장은 멀리서 보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죠. 그 전에 연구 업적도 없던 한 학자가 논문도 없이 어떤 내용을 주장했다는 소문과 주변에서 그를 지지한다는 이야기만 돌아다닌다면, 그 사람이 주장하는 바를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런 와중에 페슈트 대학 로쿠스 병원 산과 과장 자리를 맡게 된 제멜바이스는 그를 지원하던 모두에게 아무런 인사도, 언급도 없이 빈에서 사라집니다. 배신감을 느낀 로키탄스키와 슈코다가 제멜바이스와 연을 끊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페슈트 :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의 동부 지역으로 부더(Buda), 오부더(Óbuda), 페슈트가 1873년 통합되면서 부다페스트가 된다.)
게다가 1861년에야 출판된 그의 책은 두서없고 지루합니다. 자신은 “온화한 기질”의 소유자로 양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등판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반대편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공격하며 욕을 퍼붓지요. 지금은 1983년 코델 카터가 완역한 영어 번역본이 있지만, 1941년 제멜바이스 책을 번역하려고 손댄 프랭크 머피(Frank P. Murphy)는 이렇게 적습니다. “그 작품의 문체는 장황하고 지루하며, 주장은 어떤 논리적인 요점에도 이르지 못한 채 오락가락한다. 저자는 독선적이고 호전적이다.”[3] 1865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제멜바이스의 증상이 이미 책에 드러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가 책에서, 그리고 일대기에서 보인 태도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통계도 하나의 이유로 들 수 있지요. 지금 통계학은 의학적 관찰을 기술하는 핵심 언어로, 누구나 통계 유의성을 받아들이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1850년대 통계학은 아직 물리학과 확률 이론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통계학을 사회현상에 적용하려 했던 아돌프 케틀레(Lambert Adolphe Jacques Quetelet, 1796~1874)의 시도가 의학 등 제반 분야로 퍼지기 위해서는 프랜시스 골턴 경(Sir Francis Galton, 1822~1911)이 유전학에 이를 적용한 결과를 발표할 때까지, 그리고 관련 연구가 시대를 뒤흔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7] 지금처럼 모집단 분포와 통계 검정이 이론화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었고요.
이런 상황에서 출생자 수와 사망자 수, 그리고 그 비율만을 적은 제멜바이스의 표가 강력한 증거로 사용되기는 어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아직 p값을 통한 유의성 검정도 이뤄지지 않던 시절, 한쪽에서 사망자 비율이 높은 것은 사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 받아들여졌기에 그는 자신의 견해를 명료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그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통계적 유의성을 검정한 논문은 2008년 발표됩니다[8]). 그래프로 시각화하는 방법이라도 발전했다면 또 모르지만, 그런 방법이 발전하는 건 후대의 일입니다. 당시 의학계에서 진보적인 태도로 유명했던 루돌프 피르호(Rudolf Ludwig Karl Virchow, 1821~1902) 같은 인물도 제멜바이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데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거겠죠. 만약 단지 과거의 권위가 문제였다면 피르호 같은 인물은 제멜바이스의 이론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테니까요.
(루돌프 피르호 : 질병의 원인이 사회 구조와 환경에 있다고 주장하며 사회 의학(social medicine)과 의료 정의의 초석을 놓은 독일 의사로 히포크라테스 전통에 기반을 둔 체액설을 벗어나는데 크게 기여하여 “현대 병리학의 아버지”라는 경칭으로 불린다.)
이렇게 제멜바이스의 비극은 의사가 지녀야 할 미덕 중 하나를 반어법으로 보여줍니다. 어찌 보면 이론과 실험에 파묻혀 다른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진정한 “미치광이 과학자”와 달리, 의사는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요. 최근 모든 의료계열 학과가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이 바로 연상됩니다. 이것은 의사가 환자에게 잘 설명하지 못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는 인식에서 나온 귀결입니다. 그렇다면 제멜바이스가 주는 교훈은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일견 그런 부분도 있긴 하지요. 하지만 그의 일화가 제시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 대 개인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에 관한 고찰을 넘어섭니다.
우리는 의사 집단이 사회와 소통에 실패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합니다. 그것은 의사 집단이 지니는 어떤 특수성에 기인하는 것일 텐데, 단순히 권위주의적 전문가 집단이 지니는 내적 한계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법률가 집단이나 교수 집단 또한 비슷한 권위를 지녀왔던 전문가 집단이며 이들 또한 여러 가지로 비난에 직면해 있을지언정, 이들이 사회와 소통에 실패하는 일을 자주 보긴 쉽지 않으니까요. 저는 지난번 칼럼에서 살펴보았던 의사-과학자의 주체화 과정에서 그 이유를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의술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이 의사-과학자 집단은 다른 집단과 소통할 필요를 그다지 느끼지 않습니다. 자신이 찾은 근거와 자료는 내부적으로 반박될 수 있을지언정, 외부에서 들어오는 반박은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미쳐서도 안 됩니다. 바깥의 소리는 허튼소리로 치부하죠. 자신을 명료하게 표현할 필요성, 다른 집단을 설득하려고 하는 자세는 부차적입니다. 진실을 다루는 과학자가 태도나 언변 같은 겉모습에 휘둘리면 안 된다는 경구도 같이 떠올리면서요. 이런 언급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의사 집단에서 이런 말과 자세는 이상한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모습에서 바로, 자신의 발견을 글로 내놓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제멜바이스가 떠오릅니다. 과학자에게는 이런 자세가 허용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진리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간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끊임없는 탐구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 의사에겐 적절하지 않을 겁니다. 그 적용 대상인 인간, 의사 집단을 포함한 전체 사회가 그 학문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라면 말입니다.
결국 제멜바이스가 남긴 생각은 유럽 본토가 아닌 영국에서 파스퇴르의 논문들을 세심히 읽고, 이를 외과 수술실에 적용해 석탄산 소독을 시행하였으며, 자기 생각을 차분히 전달해 반대하던 외과 의사들을 기어이 설득해낸 조지프 리스터(Joseph Lister, 1827~1912)의 손으로 실현됩니다. 그러나 리스터가 소독 개념을 제멜바이스로부터 배운 것은 아니었어요. 이러다 보니 제멜바이스의 위치는 기묘합니다. 그가 세균 감염 이론과 소독법을 일찍 발견한 것은 맞지만, 제멜바이스가 진료 기술의 발전에 실제로 남긴 성취는 별로 없으니까요. 그가 남들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혹은 자기 생각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었다면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이 아쉬움을 우리 세대에서도 계속 가져가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참고문헌
[1] 남연정. 에디슨 그늘에 가린 빛나는 천재, 테슬라. 한겨레. 2007년 1월 31일.
[2] Tempest M. The Electric Rise and Fall of Nikola Tesla. TED. 2012.
[3] 셔윈 눌랜드, 안혜원 옮김, 『닥터스: 의학의 일대기』, 살림, 2009, “제9장. 세균 이전의 병원체 이론: 이그나츠 젬멜바이스의 수수께끼”
[4] Semmelweis I. Etiology, Concept and Prophylaxis of Childbed Fever. Carter KC trans.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83. pp. 87-88.
[5] Holmes OW. The Contagiousness of Puerperal Fever. Bartleby.com.
[6] 김승섭, 『우리 몸이 세계라면』, 동아시아, 2018, “6. 상식”
[7] 스티븐 스티글러, 조재근 옮김, 『통계학의 역사』, 한길사, 2005.
[8] Noakes TD, Borresen J, Hew-Butler T, Lambert MI, Jordaan E. Semmelweis and the Aetiology of Puerperal Sepsis 160 Years on: A Historical Review. Epidemiol Infection, 2008;1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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