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이 수십만년전과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 유튜버의 채널이 연일 화제다. 그는 이 채널에서 맛과 감각에 대한 놀랍고도 신기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한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 그런데 꽤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특정인을 대 놓고 디스하기도 하고, 불특정 다수의 기호에 관한 문제를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팬과 안티를 동시에 구름처럼 몰고 다닌다. 어찌되었건 유튜버로서 조회수는 이끌어내니 성공이라고 볼 수 있겠다.

들어보면 맞는 말들도 어느 정도 된다. 한번 곱씹어 볼만한 내용도 있다. 간혹 식재료의 기원에 대해서는 열심히 문헌 조사를 해 본 흔적도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본인의 개인적인 생각을 마치 검증이 완료된 팩트인것 처럼 전제하고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DNA가 단백질이라고 이야기 한 것은 본인 지식의 바닥을 살짝 보였주었던 한 단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적당히 눈감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가장 거슬렸던 부분은 바로 다음 부분이다.

 

“박카스나 지금 건강 음료를 한 병 마셨을때 오는 느낌, 기분 좋음. 뭐 이런 것을 우리 조상들이 어쩌다가 일평생 몇차례밖에 없는 꿀통을 발견하고 입에 퍼 넣는 그 때의 기분이 어땠는가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어떨까요? 거의 환각 파티가 일어나는거죠. 입에 밀어 넣고 난리가 나는거죠.
그 감각을 지금 현대인인 우리도 똑같이 가지고 있어요. 우리의 몸에 있는 감각 기관과 뇌는 수만년전 수십만년전 우리 조상의 것에서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요. 똑같습니다. 원시인의 몸으로 우리가 살고 있어요. 이 원시인의 몸으로 현대 물질 문명 속에서 살려고 하니까 그게 약간 균형감을 잃게 되는거예요.
설탕, 지금 굉장히 싸잖아요. 단맛에 대해서 극렬하게 반응하는 이 원시인의 감각으로 지금 설탕이 아주 값싸게 공급 되는 이 현대 사회를 살아간다는게 굉장히 힘들어져 있는 것이라고 보면 돼요.”
그의 유튜브 채널 단 맛 이야기 첫번째 영상 약 10:00 지점

 

현대인의 몸과 감각기관과 뇌가 수십만년 전 우리의 조상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두번에 걸쳐서 강조한다. 이 사실이 전제 되어야 그 다음 문단의 주장 – 원시인의 몸으로 살아가서 설탕에 중독되어버린 현대인 – 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 명제를 증명하기 위하여서는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자와 현대인의 유전자를 비교라도 해 보아야 한다. 최소한 단 맛에 대한 민감도가 수십만년이 지났어도 동일하게 유지 되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과연 그럴까?

안타깝게도 현대의 진화 생물학은 인간의 몸이 예전의 몸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한번 살펴보자.

 

작아진 체구

10만년전 사람의 키를 평균적으로 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깝지만 일반적으로 초기의 호모 사피엔스는 지금의 인류보다 덩치가 컸다는 것이 알려진 정설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초창기 크로마뇽인의 경우 평균 키가 183cm 가량 되었다고 추정된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평균 신장이 큰 나라라고 하는 네덜란드인들의 키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 이후 몇번의 빙하기를 거치며 눈에 띌 정도로 작아져서 1만년 전에는 약 162.5cm까지 줄었고 가장 최근 100여년 사이에는 여러가지 생존 환경의 개선으로 인해 살짝 다시 커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뇌가 더 작아졌다.

일반적인 추측과는 달리 오늘날의 인간은 초기 호모 사피엔스보다 뇌가 작다. 조금 작은게 아니라 아주 많이 작아졌다. 10만년전 호모 사피엔스 뇌의 용적은 1500cc인 반면 오늘날 인간은 1350cc이다. 무려 10% 가량의 뇌 크기가 줄어들은 것이다. 심지어 현대인은 네안데르탈인보다도 더 작은 뇌를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뇌의 용적이 점점 더 커지는 그림들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에서 호모 사피엔스까지 만이다. 크기와 성능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겠지만 다소 의외다. 초기 호모 사피엔스가 현대 시대를 살아간다면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이빨과 턱이 작아졌다.

식습관이 변하니 이빨과 턱도 따라서 변했다. 눈에 보이는 먹을 것은 모두 닥치는대로 먹었어야 했던 시절에는 강한 턱과 이빨이 생존에 유리했겠지만 농경사회 이후로 먹는 음식의 종류가 한정되다보니 (주로 곡물) 그런 강력한 턱과 날카로운 이빨을 유지하는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다. 턱의 크기는 작아지는데 이빨의 개수는 변함이 없다보니 현대인에게는 사랑니라는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 턱과 이빨이라는 물리적인 신체 도구의 변화는 식생활의 변화로부터 시작된 결과다. 농경이 시작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전으로 본다. 그 짧은 시기 안에 턱 안에 이빨이 날 공간이 부족할 정도의 진화가 진행되어 온 것이다.

 

외양의 변화

사는 환경에 따라 생김새가 달라졌다. 아마도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일 것이다.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검은색 피부, 혹은 자외선을 더 잘 받아들여서 비타민 D를 합성하기 위한 백인의 피부, 극지방의 추운 날씨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한 두꺼운 눈꺼풀, 건조한 지역에서 호흡을 통한 수분의 증발을 최대한 막기 위한 뾰족하고 높은 코 등이다.

 

그렇다면 맛이나 시각과 같은 감각 기관은?

 

인간의 수 많은 형질들 중 외형적인 부분만 따져도 이렇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위의 모든 예는 눈으로 검증이 가능한 변화들이다. 화석화된 샘플에서도 확인이 가능한 물리적인 증거들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유튜버 주장의 핵심인 인간의 “감각 기관”이 원시시대로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검증이 가능할까?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검증 불가능하다. 수십만년 전의 사람을 직접 만나서 물어보지 않는한 말이다. 그러니 변했다고 주장할 수도 없지만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하지만 여러가지 간접 증거를 통해 인간의 감각기관 마저도 큰 변화를 겪었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 수십만년 전은 커녕 현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서로 다르게 감각하는 것들이다.

 

PTC, 오이, 술

초등학교 시절, 과학 시간에 미맹 검사라는 실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PTC라는 용액을 혓바닥에 찍어 쓴 맛이 느껴지는가를 테스트 하는 것이다. 가족력을 같이 조사하면 정확한 멘델리안 유전의 예를 확인할 수 있다며 교과에서 나온 실험이다. “미맹”이라는 강한 느낌의 단어를 쓸 만한 현상은 절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우리 교과 과정에는 이런 표현이 나와 있어서 마치 맛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PTC는 phenylthiocarbamide 라는 물질을 줄인 이름인데, TAS2R38 (Taste receptor 2 member 38)이라는 유전자가 코딩한 단백질(혹은 리셉터)이 혀의 미각 세포 표면에 존재하면서 이 물질의 존재를 쓴 맛으로 느끼게 만든다. 오늘의 주인공이 바로 이 TAS2R38이다.

이런 모양으로 세포막에 걸쳐 있는 단백질이다. (회색 부분이 세포막, 위쪽은 세포 밖, 아래는 세포 안)

 

그런데 이 TAS2R38가 매우 묘한 단백질인 것이 PTC라는, 실험실에서나 나올법만 물질에만 반응하는게 아니다. 우리가 늘상 먹는 음식 성분들과도 밀접하게 반응한다. 가장 쉬운 예는 오이다. 최근에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페이스북 페이지까지 생길 정도로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오이의 쓴 맛은 cucurbitacin 계열의 성분들인데, TAS2R38은 이 물질과도 반응한다. 그래서 이 단백질이 민감한 변이를 가진 사람은 오이를 매우 쓰게 느낀다. 괜히 오이를 안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 유전자는 알콜과도 반응하여 쓴 맛을 느끼게 한다. 술 마시면 느껴지는 그 쓴 맛에도 TAS2R38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알콜은 이 유전자 외에 TAS1R3라는 수용체에도 반응을 하는데, 이 수용체는 단맛(!)을 느끼게 해 주는 대표적인 수용체다. 술을 마시면 쓰면서도 달게 느껴지는게 이 두 수용체 때문이다. 좀 더 나아가면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탄닌은 이 단백질의 친척뻘이자 역시 쓴 맛을 느끼게 해 주는 TAS2R16과 반응하는데, 이 또한 사람에 따라 느끼는 쓴 맛의 정도가 다르다.

결국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수용체들의 변이나 민감도에 따라서 단맛과 쓴 맛이 어느 정도의 비율로 느껴지는지는 천차 만별이다. 술을 달다고 마시는 사람, 써서 못마시는 사람, 모두 다 이유가 있는거다. 세계적인 소믈리에가 어디서 생산된 몇년산 와인을 에어레이션을 어떻게 해서 어떻게 마시니 최고의 맛이 나온다고 떠들어도 그게 내 입맛에도 맞는다는 보장은 없는거다.

TAS2 수용체는 현재까지 총 60여개가 밝혀졌다. 모두 쓴 맛 이라는 신호를 뇌로 보내는 단백질이지만 반응하는 물질들은 다 다르다. 한가지 물질이 여러개의 수용체를 자극하기도 하고, 하나의 수용체가 여러개의 물질을 인식하기도 한다. 우리 뇌가 “쓰다”라고 느끼기 위한 감각 물질이 이렇게나 다양하고 사람마다 고유한 변이들을 가지고 있을 것인데 모든 사람들이 맛을 동일하게 느낀다라고 생각한다? 현대인끼리도 이렇게 다를텐데 수십만년 전의 인간과 현대인이 같다? 모두 다 어불성설이다. 수만년의 식습관이 입맛을 결정하는 유전자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내 입맛에 맞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다른 사람의 취향을 폄하하는 것이 생물학적 지식의 부족을 떠나서 얼마나 몰상식한 일인지를 알 수 있다.

 

색맹

미각이 저렇다면 시각은 어떨까? 시각도 미각과 비슷하게 한번 접근해 보자. 바로 색맹이다. 미맹 만큼이나 과장된 표현이 색맹이다. 단어만 놓고 보면 마치 온 세상이 흑백으로 보일 것 같아 보이는 증상이지만 그런 색맹은 거의 없고, 대부분의 경우는 빨간색과 초록색을 담당하는 원추세포가 인식하는 파장의 일부가 중첩되어 이 둘의 구분을 잘 하지 못하는 경우다.

 

 

색맹은 유전이라 사실상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위 그림의 회색 막대 영역의 파장만을 선택적으로 막아서 이 두 색을 분리해 주는 렌즈가 팔리고 있다. 아래 영상은 한평생을 적녹 색맹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이 필터로 된 안경을 처음 써 보고 놀라는 영상이다. (끝까지 보면 조금 감동스럽다.) 특정 파장을 막는 렌즈이다보니 선글래스같은 조도 감소는 어쩔 수 없어서 실내에서 사용하기에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으나, 한평생을 빨간색과 초록색의 구분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수준인 것 같다.

페이스북의 색깔이 파란색인 이유도 마크 주커버그가 적녹색맹이라서 자기 눈에 잘 보이는 색으로 로고를 만든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태까지 색맹 검사를 하면 정상인 사람을 읽을 수 있고 색맹인 사람은 읽지 못하는 그림들만 보아 왔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색맹인 사람만 읽을 수 있고 정상인 사람은 읽지 못하는 그림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필자 본인은 색맹이 아닌지라 위의 그림에서 어떤 숫자를 읽어낼 수 없지만, 적녹 색맹인 사람은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45, 5, 그리고 73이라는 숫자가 보여야 한다고 한다. 혹시 이 숫자가 보이는 독자는 제보 바란다. (이미지 출처)

진화적으로 볼때 색맹은 일부 보호색을 더 잘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카키색의 밝기를 더 정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연구는 은근히 역사가 길어서 이미 1940년에 네이처에 논문이 실린 적이 있고, 2차 세계 대전 때에는 일부러 색맹인 병사들을 선호했다는 기록도 있다. 색맹을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잘못 된 것일 수도 있는거다. 어떤 특별한 환경적 사건이 발생하면 색맹인 사람들의 생존율이 더 높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 눈에 보인다고 해서 남의 눈에도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이 보는 것을 내가 못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감각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마다 다양하다.

 

결론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각의 다양성은 지구상의 사람들의 숫자 만큼이나 다양하다. 원시 시대의 인간과 현대의 인간이 동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참 용감한 일이다. 심지어는 한 사람에게서도 그의 생애 주기와 속한 환경에 따라서 감각 기관은 다르게 변화한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입덧이 심한 임신부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이때의 입맛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변하는지는 겪어 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정도다.

따라서 자기 주장을 합리화 하기 위해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의 감각이 동일하다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은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지식 전달을 빙자한 전체주의다. 단순화된 명제가 본인의 의견을 뒷받침하기에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universal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identical하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단순화 능력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고민해 보았는데, 대략적으로 유추해 본다면 그 분의 주장의 배경이 되는 지식들은 주로 건강 관련한 에세이나 쇼닥터들의 유튜브, 혹은 홈페이지 등인 것으로 판단된다. 마침 인터넷을 찾아보니 인간의 몸이 원시시대와 동일하다라는 주장을 하는 책들이 몇 권 있다. 특히 진화 의학을 표방하는 몇몇 책들 중에서 “우리 몸은 아직 원시시대” 류의 주장을 하며 나온 건강 서적들이 있는데, 이런 책들이 그의 소위 “과학적” 주장의 배경이 아닌가 싶다. 진화 의학이 암에 대한 이해에 기여한 바가 없지는 않으나 이런식으로 원시 시대의 몸이 현대 인류의 몸과 똑같다고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쓰여서는 안된다.

뭔가 주장을 하려면 건강 에세이들이 아닌 학계에서 검증된 논문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외국의 유튜브나 쇼닥터, 혹은 이해 관계자들의 일방적인 뇌피셜을 앵무새처럼 따라 할게 아니라, 현재의 과학자들이 어느 정도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과학적인 자료를 토대로 이야기를 하란 말이다. 수만명의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버가 하는 이야기가 회식 자리에서 부장님이 신입 사원들 앉혀 놓고 자신의 잡지식 자랑하는 수준은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같은 세상에 공개적인 자리에서 뇌피셜을 어설프게 떠들었다간 영원히 남을 흑역사 짤이 되어 인생을 따라다니기 십상이다. 당장 디엔에이가 단백질이라고 했던 영상만 하더라도 그 다음날로 짤 생성되어 각종 사이트에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감각은 매우 주관적이다. 하지만 이 주관이 심리적인 영역이나 교육에 의해 100% 결정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파를 싫어하던 내 누이는 어머니의 수십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파를 먹지 않는다. 맛이 없는건 맛이 없는거다. 이 좋은걸 왜 안먹지? 저 맛 없는 것을 맛있다고 먹어? 이게 진짜로 맛있다고? 와 같은 소리는 모두 쓸데 없는 오지랖이다.

떡볶이, 혹은 전라도 음식이 맛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그의 자유지만, 맛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세뇌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설탕만 바르면 모든 사람이 배가 불러도 목구멍 너머로 꾸역 꾸역 넘길 것이라고 생각하는것도 착각이다. 단 것을 좋아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설탕에 중독된 사람들의 일그러진 입맛이라면, 재료 본연의 맛을 좋아하는 것은 어려서 집이 가난하여 모든 음식을 생으로 섭취할 수 밖에 없었던 불행했던 유년기가 남긴 왜곡된 입맛인가?

사람들의 기호와 감각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전체적인 방향의 일관성은 있겠지만 그 안에서도 수 없이 많고 작은 다른 방향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느끼지만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가 잘못된 교육이나 사회 시스템에 의한 강요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자세다. 전체주의가 별거 아니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거나 느끼는 사람을 계도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이자 천박한 계몽주의다.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 어줍잖은 지식으로 뇌피셜을 떠들어 대도 검증이 안되니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는 시대는 지났다.

 

참고 문헌

호주 자연사 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seehint.com/r.asp?md=204&no=12853

https://en.wikipedia.org/wiki/TAS2R38

https://news.joins.com/article/21549665

http://www.color-blindness.com/color-blindness-t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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