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가 정신질환 목록에서 빠지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익명 의사”

그림. 1972년 미국 정신의학회 토론장에 선 “익명 의사”.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제는 많이들 잊으셨겠지만 한창 주가를 높이던 홍석천 씨가 2000년 공개적으로 커밍아웃 (동성애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남들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 한 일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드라마 <남자셋 여자셋>에서 여성스러운 디자이너 쁘아송 역으로 인기를 얻었던 그는 실제로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지만, 자신의 운동 실력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출발 드림팀>에서 다른 출연자보다 뛰어난 운동 실력을 보여주며 일단 의심을 거둔 상태였거든요. 하지만 그 후 그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고 이 소식은 각종 연예 지면에 대서특필되면서 확대 재생산되었습니다. 홍석천 씨는 당시 출연하던 프로그램 모두에서 하차해야 했고 한동안 지상파 출연 금지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 뒤로 일어난 이야기는 모두 알고 계시는 그대로입니다. 그는 당시 주목받지 않던 이태원동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열고 우리나라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동남아 음식을 소개하는 등 사업 영역을 넓혀 갔습니다. 그는 여러 식당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예전의 인지도를 회복했고 지역 사회에 공헌하며 생긴 주민들의 관심을 바탕으로 2017년에는 용산구청장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지요. 텔레비전 방송에도 다시 출연한 것은 물론입니다. 가끔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하다 2007년부터 케이블 방송을 중심으로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죠. 이제 그가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합니다.

하지만 한 번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 말고 또 텔레비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성소수자가 있을까요? 한때 하리수 씨가 활동했던 것 외에 바로 떠오르는 예가 없는 걸 보면, 아직 우리에게 흔한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굳이 왜 성소수자를 자주 봐야 하느냐고 물으실 수는 있습니다.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런 얘기들은 세상을 어떤 곳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와도 얽혀 있으니까요. 성소수자 더 좁게는 동성애자에게 도덕적인 문제를 묻기 전에, 일단 그들이 우리와 이 사회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을 텔레비전에서, 라디오에서, 신문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비율로 봤을 때 이상한 일일 겁니다. 사회문화적 상황이 우리와 비슷한 일본에서 2015년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본의 성소수자는 전체 인구의 7.6%라고 합니다.[1] 매체가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면 매체에 등장하는 사람 스무 명 중 한 사람은 성소수자여야겠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전체를 통틀어 한 명 보기도 쉽지 않은 게 우리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사회가 성소수자를 검열하고 있다는 것. 아직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못한 국내 실정상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갈 길은 여전히 멀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 여전히 성소수자가 낙인이고 치부인 사회에서 그들이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혹자는 퀴어 축제가 매해 열리는 나라에서 뭘 그리 숨기느냐고 하겠지만, 숨겨야 하기에 축제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요. 숨길 일이 아니라면 축제를 벌일 이유도 없지요. 축제란 정체성이 잠시 유예되는 공간이고, 억압에 대한 반발로 만들어진 시간이라는 시각에서 본다면요.

이런 상황은 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오랜 노력으로 부정적인 시각이 점차 사라지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소수자 집단을 구성하지 않아도 될 만큼 받아들여진 것도 아직은 아니지요. 이런 변화에서 긍정적으로도, 또 부정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해 왔던 것이 바로 정신의학입니다. 정신의학이 동성애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동성애자를 포함한 성소수자의 사회적 위치는 크게 변화해왔지요. 오늘은 그 변화를 살펴보려 합니다. 특히 동성애가 정신질환 목록에서 빠지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익명 의사(Dr. Anonymous)”, 존 프라이어(John E. Fryer, 1937~2003)의 이야기입니다.

 

동성애, 범죄에서 질환이 되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남성 간 동성애는 공공연한 일이었다고 합니다.[2] 하지만 기독교 사회가 되면서 서구는 그 후로 계속 동성애가 죄악이라는 견해를 유지해 왔습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는 큰 번영을 누렸지만, 결국 하느님의 벌을 받아 멸망하게 됩니다. 이때 도시 사람들이 범한 가장 큰 죄 중 하나가 바로 동성애였지요. 이런 생각은 19세기까지 이어집니다. 예컨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에서 교회법이 동성애를 정죄해왔음을 지적하지요.[3] “양성구유자(兩性具有自)는 범죄자나 비행자”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성구유(androgyny)란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동시에 지닌 사람입니다. 흔히 우리가 양성구유라고 말할 때 가리키는 “남녀 생식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상태”는 반음양(hermaphroditism)이라고 부르며, 의학적 정의로는 생식선과 외성기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가리키지요. 18세기의 양성구유자란 남성인데도 여성의 사회적 특징도 같이 지니고 있어 남색(sodomy)을 하는 사람을 말했습니다. 당시 교회법은 지금과 달리 개인의 삶을 규율하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가 어떤 곤란을 겪었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림. 18세기 중엽에 그려진 이 그림은 한 남자가 남색(sodomy)으로 처벌받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매를 쳐라!”, “거시기를 잘라버려!”라는 난폭한 말이 주위에서 터져 나온다. 고발당한 사람은 “이제 ‘구멍’에 들어와 있으니 친구들 어서 오시게”라는 성행위를 떠올리게 하는 말을 하고 있다. 작가 또한 묶인 사람에 비판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아래에 이 남자가 모인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쓰여 있다. 출처: 대영 박물관

 

동성애는 19세기에 들어와 과학적 담론의 대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푸코의 말에 따르면, “남색가는 과오를 반복하는 사람이었던 반면, 이제 동성애자는 하나의 종(種)”이 됩니다.[3] 즉, 동성애가 이전에 도덕적 일탈로 받아들여졌다면,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병리적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19세기의 창조물인 “병원*” 또한 동성애를 “탄생”시키는 역할을 합니다.[4]

* (18세기 말 유럽이 전화에 휩싸이면서 군의(軍醫)를 집중적으로 훈련할 기관과 부상병을 수용할 병원의 필요성이 나타났다. 따라서 정책적으로 교육 병원이 설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2년제의 임상 중심 의학 교육기관이 프랑스에 세워졌고 병원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제도적 변화는 병원이 의학적 지식 생산의 중심지가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질환으로 분류되기 시작한 동성애는 여러 분과에서 다뤄졌어요. 성과학(sexology),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 호르몬 연구(hormonal studies) 등이 동성애를 연구하는 대표적인 분과들이었죠.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동성애는 정신적인 것, 신체적인 것, 또는 정신-신체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 (호르몬 연구 관점에서 보자면 동성애는 신체적인 원인, 즉 호르몬 분비의 과다 또는 결핍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성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동성애는 정신-신체적인 원인, 즉 성 기관의 이형성으로 인한 정신 발달의 이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동성애는 거세 불안에 대한 잘못된 반응, 도착, 공포증 등 전적으로 정신적인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1950년대에 들어서 정신의학이 이들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이는 20세기 초 전기 충격 요법이나 인슐린 혼수 요법, 뇌수술 등 정신질환에 대한 치료법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변화였습니다. 전기 충격 요법은 혐오 조건 형성 치료(aversive conditioning therapy)에 속하는 치료법인데, 환자가 부정적인 행동을 할 때 과도한 충격이나 고통을 가해 해당 행동을 피하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파블로프의 개를 아시지요. 음식을 줄 때마다 종을 울렸더니 종을 치면 침을 흘렸다는 발견이 긍정적 조건 형성이라면, 이 반대 방향도 얼마든지 가능할 겁니다. 인슐린을 과량 주사할 경우 환자가 저혈당으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중독 증상으로 치료를 받던 어떤 환자에게 우연히 인슐린이 과다 주사되어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회복 후에 중독 증상이 사라진 일이 있었어요. 인슐린 혼수 요법은 이런 작용을 이용한 것입니다. 인슐린 혼수 요법은 이후 꽤 오랫동안 다양한 증상에 정신질환 치료법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뇌수술은 아직 두개골을 열어 뇌를 직접 수술할 수 없었던 20세기 초, 코로 막대를 넣어 전두엽을 절제하는 뇌엽전리술(lobotomy)을 가리킵니다. 평이하게 말하면 코를 통해 집어넣은 막대로 뇌에 상처를 입혀 환자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것인데, 이론적 근거가 없음에도  한동안 치료법으로 자리매김했지요.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주인공이 마지막에 받게 되는 치료가 바로 이 뇌엽전리술입니다.

물론 이들 치료법이 지금 관점에서 보면 환자를 고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극단적인 수면 방해와 냉수 자극 등 소위 “도덕적 치료”를 강행하던 당시에는 의학이 진보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지요. 이에 더하여, 1952년 미국 정신의학회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 초판을 발표합니다. 이것은 세계 보건 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가 발간한 국제질병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 6판을 확장한 것이었어요. 그 속에서 동성애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Sociopathic Personality Disorder)로 분류됩니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라니 말이 어렵지만, 결국 구제불능으로 격리가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본 것이죠.

이런 치료법의 등장, 그리고 질병으로 분류되는 것을 당시 동성애자들은 환영했다고 해요.[5] 이전까지 범죄로 보던 동성애가 질환이 된다면, 차라리 그게 낫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겠죠. 또한 동성애가 치료될 수 있다면 치료받았으면 좋겠다는 희망도 어느 정도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 동성애를 치료하겠다고 사용된 소위 의술은 전기충격요법이나 호르몬 치료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컴퓨터 이론과 인공지능 연구에서 불후의 업적을 남긴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이 호르몬 치료를 받다가 자살한 일은 2015년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이 주목받으면서 다시금 인구에 회자한 바 있습니다. 치료 대상인지 여부를 떠나 치료해야 한다는 당위로 가해졌던 요법치고는 너무 가혹했습니다.

그림. 동성애 치료를 위해 활용된 충격 요법은 “파블로프의 개” 실험으로 유명한 고전적 조건 형성(classical conditioning)을 이론적 기반으로 한다. 충격 요법은 거장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1971)에서 “루도비코 기법(Ludovico technique)”이라는 이름으로 강렬하게 묘사된 바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악당 알렉스 드라지(Alex Delarge)는 치료의 일환으로 섹스와 폭력이 난무하는 영상을 보며 구토감을 일으키는 약물을 투여받는다.

 

1968년 DSM-II가 발간되었고, 동성애는 이상 성욕(paraphilia)으로 분류가 바뀝니다. 그들은 사회 불순분자에서 이제 변태성욕자가 됩니다. 이상 성욕으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소아성애(pedophilia)이니, 불순분자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큰 문제를 일으키는 행동을 하는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죠. 이에 동성애 인권 운동가들은 정신의학이 동성애를 질환으로 분류하는 것을 문제 삼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프랭크 카메니(Frank Kameny, 1925~2011)와 바바라 기팅스(Barbara Gittings, 1932~2007)라는 두 운동가가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카메니는 미군 지도국(Army Map Service) 천문학자로 근무하던 1957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해고당한 후 운동에 뛰어듭니다. 그는 미국 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가 동성애자를 억압하고 있다고 보고, 이들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카메니는 동성애자가 이미 오랫동안 사회의 편견에 둘러싸여 있어 왔기 때문에 동성애자를 제외한 다른 집단은 동성애자를 올바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는 동성애에 진단명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동성애자에게서 나와야지, 다른 사람이 진단명을 붙이는 일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진단명을 제거하는 일은 동성애자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했던 그에게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한편 기팅스는 동성애 치료에 관한 정신의학자의 강의 후에 카메니가 토론에 나서 “동성애는 병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것을 보고 큰 영향을 받습니다. 당시 발표된 킨제이 보고서와 이블린 후커(Evelyn Hooker, 1907~1996)의 연구는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심리적으로 다르다는 기존 주장을 뒤엎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지요. 당시는 정신질환의 근거로 심리검사가 사용되곤 했어요. 만약 동성애가 질병이라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는 심리 검사에서 다른 결과가 나와야 할 겁니다. 하지만 킨제이 보고서와 후커의 연구 모두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심리 검사 결과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낸 것이죠. 기팅스는 이런 연구 결과에 힘입어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정신의학이 과학적이지 않은 근거로 동성애를 질환으로 분류한다는 이유로 모인 사람들은 동성애자 연대를 조직, 1970년 미국 정신의학 학회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입니다.

1972년이 되자 미국 정신의학회는 충돌을 피하고자 동성애 인권 운동가에게 발언 자리를 마련해주기로 합니다. “정신의학: 동성애의 친구인가, 적인가? 대화의 자리(Psychiatry: Friend or Foe to the Homosexual? A Dialogue)”라는 제목으로 열린 모임에 패널로 나선 것은 카메니와 동성애를 질환 목록에서 제외하는 데 동의하는 정신의학자 몇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토론자 중 화룡점정이었던 사람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존 프라이어였습니다. 동성애에 관한 문제는 동성애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카메니의 주장을 따른다면, 누구보다도 꼭 발언해야 했던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 동성애자면서 정신의학자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존 프라이어, 리처드 닉슨의 가면을 쓰고

 

존 프라이어는 1962년 미국의 밴더빌트 의대를 졸업하고 보수적인 캔자스주 토피카시에 있는 메닝거 재단에서 정신의학과 수련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수련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의 정신분석가가 프라이어에게 동성애 경향을 감추려다 우울증이 나타나니 이곳에서 일하기 어렵겠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곳을 떠나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수련을 다시 시작하지만,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또 쫓겨나지요. 이번에는 노리스타운 주립병원으로 옮겨 프라이어는 겨우 수련을 마칩니다.

1967년부터 그는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교에 정신의학과 강사 자리를 얻어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깊이 관여했던 분야는 환자의 죽음이 의료진에 미치는 영향이었어요.[6] 그때 기팅스는 열심히 동성애자 정신의학자를 찾고 있었고, 우연한 기회에 프라이어와 연결이 됩니다. 기팅스는 프라이어를 설득해 발언자로 초청하려 합니다.[7] 하지만 두 번이나 동성애 성향 때문에 쫓겨난 경험이 있는 프라이어는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죠. 당시 그는 대학 정규 교원도 아니었고, 설사 정규 교원이라 할지라도 자리를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팅스가 보기에 의료진의 심리를 계속 다뤄온 프라이어는 이 토론에서 꼭 발표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전선(戰線)은 “의료인 속 동성애자”가 지니는 의미를 놓고 설정될 것이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다른 사람을 찾기는 더 어렵다고 판단한 기팅스는 다시 한 번 간곡히 요청하고, 프라이어는 결국 변장을 하고 토론회에 참석하는 조건으로 찬성하게 됩니다.

그림. 미국 정신의학회 토론장의 기팅스, 카메니 그리고 ‘익명 의사’. 연단에 서 있는 사람은 사회자인 미국 정신의학회 소속 켄트 로빈슨(Kent Robinson). 출처: 뉴욕 공공도서관

프라이어는 당시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의 얼굴 가면과 곱슬머리 가발로 모습을 감추고 커다란 턱시도를 입어 자신의 큰 몸집마저 가린 채 1972년 미국 정신의학회 연례 모임의 패널로 참석합니다. 그는 “익명의 헨리 의사(Dr. Henry Anonymous)”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죠. (헨리는 프라이어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토론자들은 정신의학이 동성애를 바라보는 관점이 편향되었음을 지적하고 정신의학자, 특히 동성애자임을 숨기고 일하고 있는 정신의학자들이 있다면 동성애자와 연대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익명의 의사가 발언을 시작하죠. “나는 동성애자입니다. 나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정신의학자(정신과 의사)들을 멈칫하게 만드는 발언이었어요. 정신의학이 오랫동안 견지해왔던 기본 가정 중 하나인 의사 자신이 정신질환을 갖고 있지 않기에 정신질환을 분류하고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정면으로 반박당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정신분석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로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가가 진료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가 자신이 정신분석을 받아야 하며, 몇 년마다 주기적으로 분석을 받아 자신이 건강함을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신분석 이론에서 이어진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던 20세기 중반의 정신의학 또한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의사 또는 정신과 의사가 병에 걸리는 것, 특히 정신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건 잘못 아닌가 하는 생각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요. 의사, 그리고 정신과 의사 또한 정신과적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진료 등 다른 도움을 받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익명 의사”는 발언을 이어 갑니다. 발언의 마지막에서 그는 동료 “동성애자인 정신과 의사들”에게 동참을 촉구합니다.

 

“동성애자 정신과 의사 여러분,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모두가 동성애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려는 시도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직접 노력하고 방법을 찾아 나갑시다. 우리는 모두 잃을 것이 있습니다. 교수직에서 쫓겨날 수도 있지요. 바로 길 아래에서 진료하던 분석가가 환자 의뢰를 그만할 수도 있습니다. 상사가 잠시 일에서 벗어나 있으라고 요구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의 완전한 인간성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더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간적으로 온전히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본성에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 이것이 가장 큰 상실이며, 이 상실은 다른 사람들 또한 인간성을 잃게 만듭니다. [주위의 동성애자]가 자신의 동성애와 화해할 때, 우리 [동성애자인 정신과 의사] 또한 자신과 화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기술과 지혜로 우리는 물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도와 동성애라고 불리는 인간성의 작은 조각과 화해할 수 있도록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8]

 

발언이 끝나자 토론장에 있던 사람들은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정신의학과 내부에는 동성애자가 없을 거라는 사람들의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이었어요. 또한, 정신의학이 동성애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관한 입장을 제시하는 발언이기도 했습니다. 최소한, 동성애를 이유로 누군가를 직장에서 내쫓지는 말아야 한다는 결의이기도 했지요. 그 결과로 1973년 12월, 미국 정신의학회는 동성애를 DSM에서 제외하기로 합니다.[9] 이후 정신의학은 동성애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정신과적 문제를 치료하는 것으로 의료 방향을 전환합니다. 프라이어가 자신이 바로 그 익명의 의사였다고 밝힌 것은 20년이 지난 1994년 미국 정신의학 학회에서였습니다. 병명에서 제외되었다고 하여, 그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밝혀지는 것이 쉬워진 건 아니었어요. 프라이어는 여전히 자신의 직업을 잃을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한 번 새겨진 낙인이 금방 지워질 수는 없으니까요. 미국 정신의학회는 그가 사망하고 2년 후인 2005년 “프라이어 상”을 제정했습니다.[10] 1990년대 이후 성소수자에 대한 의학적 접근은 다른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관념이 자리잡고, 여성 환자의 신체는 표준 남성을 기준으로 한 기존의 접근과 달라야 한다는 젠더 의학이 나타나면서,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정신 건강 증진 노력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이 상을 제정한 것입니다. 상에 존 프라이어의 이름을 붙인 것은, 1973년 그가 가면을 쓰고 나타났던 용기를 기리는 것이겠지요.

 

정신질환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먼 길

 

동성애가 정신질환 목록에서 빠지게 되었다는 결정을 듣고 기팅즈는 “2000만 동성애자가 순식간에 치료되다(Twenty Million Homosexuals Gain Instant Cure)”라는 글을 신문에 기고합니다(기사는 “동성애자가 순식간에 치료되다”로 제목을 바꿔 게재되었습니다).[11] 익명의 의사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셈입니다. 물론 1973년의 결정이 오직 프라이어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동성애 진단명 개정과 DSM-III 편집을 진두지휘한 정신의학자 로버트 스피처(Robert Spitzer, 1932~2015) 역시 정신의학이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동성애로 인한 정신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습니다.[12] 하지만 가면을 쓴 “익명의 의사”의 등장은 그야말로 판도를 뒤엎는 역할을 했지요.

정신의학은 동성애를 질환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풀었습니다. 한때 범죄자로 내몰렸던 동성애자들에게 정신의학에서 동성애를 질환으로 규정한 것은 일종의 해결책이었어요. 하지만 그 해결책이 다시 동성애자들의 목을 죄게 되자, 그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는 없었지요. 이 애증의 관계는 이후 에이즈가 창궐하면서 다시 반전됩니다만,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남겨두기로 하겠습니다.

익명의 의사 이야기는 의학이 질병에 붙이는 “이름” 또는 텍스트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말해줍니다. 의학이 대상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름, 즉 이미지와 텍스트는 한 집단의 정체성을 좌우하며, 집단이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또한 결정합니다. 그 집단의 구성원에게 일종의 사회적 위치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 집단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론은 이 텍스트가 단지 사회적 위치를 부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이 자기를 정위(定位)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병명 또는 규정은 질병에 붙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이 개인적, 사회적으로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요인이기도 한 것입니다. 물론 이름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익명의 의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귀한 교훈입니다. 살리기 위해, 돕기 위해 쓰였던 이름이 언젠가 압제와 고통으로 바뀐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하기 위한 용기일 겁니다.

우리는 동성애에 어떤 “이름”을 붙이고 있을까요? 아마 누군가는 여전히 죄악을, 누군가는 질병을, 누군가는 취향을 그 이름에 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각 입장이 내건 논리와 신념, 그리고 사회적 필요를 알기에,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요. 이 모든 것을 정리해 줄 의과학적 근거도 아직은 없고요. 하지만, 한 가지는 꼭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 모든 이름은 결국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것을요. 아무리 좋은 뜻이라 해도 그것이 누군가의 직업을, 집을, 관계를, 심지어 존재를 빼앗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걸요. 그것이 아마 갈등 상황에 있을 때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 인간성의 한계가 아닐까요.

 

참고문헌

 

[1] Yoshino T. 일본의 성소수자는 인구 전체의 7.6%(여론조사). 허핑턴포스트. 2015년 4월 24일. <https://www.huffingtonpost.kr/2015/04/24/story_n_7133620.html>

[2] 윤일권. 고대 그리스 사회와 신화 속의 동성애. 『유럽사회문화』. 2010;3:5-27.

[3] Foucault M. Historie de la sexualité: Tome 1 La volonté de savoir/ 이규현 역.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 나남. 2010.

[4] Wahlert L. The Painful Reunion: The Remedicalization of Homosexuality and the Rise of the Queer. J Bioeth Inq. 2012;9(3):261-75.

[5] Anderson-Smith C. The Lasting Legacy of Dr Anonymous. The Psychologist. 2018;31:84-86.

[6] Scasta DL. John E. Fryer, MD, and the Dr. H. Anonymous Episode. J Gay Lesb Psychot. 2003;6(4):73-84.

[7] Lenzer J. John Fryer. BMJ. 2003;326:662.

[8] Full Transcription of Fryer’s Speech. Historical Society of Pennsylvania. Undated. <https://hsp.org/sites/hsp.org/files/dr%20henry%20anonymous%20speech_0.pdf>

[9] Clendinen D. Dr. John Fryer, 65, Psychiatrist Who Said in 1972 He Was Gay. The New York Times. Mar 5, 2003. <https://www.nytimes.com/2003/03/05/us/dr-john-fryer-65-psychiatrist-who-said-in-1972-he-was-gay.html>

[10] Fryer Award.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https://www.psychiatry.org/psychiatrists/awards-leadership-opportunities/awards/fryer-award>

[11] Marcus E. Making Gay History: The Half-Century Fight for Lesbian and Gay Equal Rights [Electronic edition]. New York: HarperCollins. 2002. p. 179.

[12] Carey B. Robert Spitzer, 83, Dies; Psychiatrist Set Rigorous Standards for Diagnosis. The New York Times. Dec 26, 2015. <https://www.nytimes.com/2015/12/27/us/robert-spitzer-psychiatrist-who-set-rigorous-standards-for-diagnosis-dies-at-8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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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깎는 의사

의료윤리와 의료인문학을 전공한 소아치과 의사로, 의료와 사회, 이야기가 교차하는 지점을 연구하고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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